우리들의 이야기

일본 IT황제 손정의, 그 삶과 일(1)

가자 세계로 2011. 11. 30. 10:24

요즘, 한국과 일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가 샐러리맨들 사이에서 때아닌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작년에 NHK-TV에서 방영한 대하 드라마 '료마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한국 언론에서도 여러 번 료마에 대한 특집기사를 싣기도 했다. 최근에는 일본IT 산업의 황제라고 일컫는 재일동포 3세 손정의 회장의 멘토가 바로 ‘료마’라고 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일본근대사에 있어서 1800년대의 풍운아가 사카 모토 료마라면, 190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IT산업의 폭풍같은 현대화 물결을 몰고 다니는 이는 역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다. 일본에서 손회장이 움직이면 늘 그곳에는 크고 작은 바람이 인다. 얼마전에는 3월 11일 동북대지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동북지방 4개 현에 100억 엔이라는 재해연금을 내 일본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원전폭발로 수많은 피폭피해자가 발생하자, 이제는 태양열을 이용한 태양에너지 확산 친환경 운동가로 변신, 일본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다. 바로 그에 대한 일대기를 매일 제이피뉴스에서 연재하기로 한다.


80년대 초, 일본기자들 사이에서는 한 남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굉장한 기업가가 탄생했다.”
“그사람 천재아냐?”
“뭔가 일을 낼 사람이다.”
“시대의 트랜드를 읽어낼 줄 아는
비즈니스맨이다.”
“키도 조그맣고 얼굴도 단단하게 뵈는 게 꼭 천재 스타일이야!”

나중에는 급기야 황당한 루머까지 돌았다.

“그사람 사기꾼 아니야? 그것도 국제사기꾼!”

이 같은 세간의 평가들을 아사히신문에서 발간하는 '주간아사히'가 한마디로 정의해버렸다.

‘괴물실업가’

83년 당시, 그에 대한 특집 기사가 나왔을 때, 일본기자들은 물론 샐러리맨들 사이에서도 많은 화제가 됐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컴퓨터’라는 영역이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그 생소한 분야에서 그 스스로 개척자임을 자임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제로 선두에 서서 ‘비즈니스화’시키고 있었다.

사실 그때만 하더라도, 일본기업의 경영형식은 대부분 아날로그 체제였다. 1945년 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재창업된 대기업들이 많아, 나이든 경영주들은 기계작동에 의해 전산화되는 컴퓨터 시스템에는 대단히 낯설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그대로 중소기업으로 이어져, 80년대 중반까지 중소기업이 컴퓨터를 통해 업무를 보는 그런 회사는 많지 않았다. 대기업만이, 그것도 특별한 부서에만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혜성처럼 나타난 이가 바로 손정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손정의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손정의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알아들을 턱이 없었다. 게다가 용어도 모두 영어였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데스크톱, 케이블 등등. 일본인들이 영어의 뜻을 몰라서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게 아니었다. 우선 그 실체를 몰랐다. 대기업 사원 외에는 일반인들이 컴퓨터를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어떤 기계에, 어떤 방법으로 사용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었다.

한 예로, 당시 논문을 가장 많이 쓴다는, 일본의 수재들이 전부 모여있다는 도쿄대 교수들조차도 컴퓨터를 사용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값도 굉장히 비쌌거니와 그만큼 컴퓨터 보급이 대기업에 한정돼 있었다. 그것도 소프트웨어 기술은 일본의 대기업조차 전무했다.

그런 시기에 손정의는 보무도 당당하게 일본경제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렇다고 첫 숟갈에 배가 부를 리가 없었다. 1981년, 자본금 2천만 엔에 아르바이트 사원 2명을 데리고 그의 고향인 후쿠오카에서 '일본소프트뱅크' 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큰소리쳤다.

"앞으로 매상고는 창업 5년 안에 100억엔, 그리고 10년 후에는 500억 엔을 올릴겁니다."

이 말을 들은 2명의 사원은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무슨말을 하는 거야?'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나다를까. 역시 그들은 정확히 두달 후에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사람을 보는 눈도,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도 없었다. 그저 손정의란 인물에 대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인식이란, 현실과는 거리가 먼 '허풍쟁이'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은 손정의가 말한 대로 훗날 그대로 이루어졌는데도 말이다.


▲ 손정의 ©JPNews


두 달 만에 두 명의 사원이 나간 뒤, 손정의의 의욕은 더욱 불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신의 경영이념과 철학을 이해 못 하는 부하직원이라면 빨리 나가주는 것이 오히려 도와주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암초는 직원의 퇴사 외에 또 있었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암초가.

일본금융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일본은행은 비가 오지 않을 때 우산을 빌려 주고, 비가 오면 그 우산을 되돌려달라고 재촉한다."

즉 이 말은, 회사가 잘 나가면 일부러 찾아와서 은행 돈을 써달라고 부탁하고, 반대로 회사가 어려워지면 빌려 간 돈을 빨리 내놓으라고 조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손정의는 일본은행으로부터
자금확보를 하고자 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에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은행은 한 군데도 없었다.

이 같은 손정의에게 일본금융계 외에도 또다른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재일한국인 3세라는 것. ‘재일한국인’이라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에게는 차별의 상징인 ‘조센징’이었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한 후, 일제 강점기시대에 강제징용, 연행됐다가 그대로 일본에 남게 된 재일동포1세들이 많았다. 손정의의 조부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일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생 지옥속에 놓여 있었다. 일본은 미국과의 전면전에서 나가사키-히로시마에 원자폭탄만 맞은 것이 아니라, 일본 전 국토에 무자비할 정도로 폭탄세례를 받았다.

일본의 한 작가는 당시의 상황을 '비 오듯 하늘에서 폭탄이 쏟아져 내렸다'고 표현했다. 그 결과, 일본의 웬만한 도시는 부서진 건물의 잔해만이 앙상하게 남았다.

때문에 1950년, 한반도에서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그야말로 일본인들은 생지옥 속에서 살아야 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눈비를 가려줄 그런 집 한 칸조차 제대로 없었다. 도쿄 우에노역 앞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 굶어죽어 나갔고, 종전 직후에는 백 명도 넘는 사람이 죽어나간 일도 있었다. 게다가 종전하자마자 일본을 통치하게 된 GHQ(연합사령군)가 일본군대는 물론, 일본재벌을 모두 해체시켜버려 일할 곳도 없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일본에 남아 있던 재일동포들은 절대빈곤 속에서도 또 하나의 빈곤을 맛보아야 했다. 같은 땅에서 살고, 같은 말(일본어)을 쓰면서도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이다. 식민지 시절에는 '같은 일본인’으로 취급하던 일본인들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돌변해서 자기 밥그릇을 빼앗아 먹는 이방인으로 매도하고 구박했다. 그 연장선에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밀항해 오는 한국인들이 재일동포 1세들의 입지를 자꾸만 좁게 만들었다.

때문에 재일동포들은 번화한 곳보다는 외진 곳으로, 그리고 산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 곳곳에 소위 ‘조선인 부락촌’이 자연스럽게 형성됐고, 거기서 돼지를 키우고, 밀주를 만들고, 또 엿을 만들어 팔았다. 더 심한 경우는 폐허의 잔해더미 속에서 쇠붙이나 폐품을 긁어 모아 생계를 이어 가는 재일동포들도 다수 있었다.

당시 이런 모습은 일본영화 '박치기'에서 묘사되기도 했다.

아무튼 재일동포들은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가 없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장사를 해보려고 해도 자금이 없었다. 같은 조선인들은 돈이 없었고, 일본인들은 그들이 차별하고 싫어하는 ‘조센징’에게는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일본이 6.25동란과 베트남 전쟁의 특수를 누려 고도성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정책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에 남은 재일동포 후세대들이 집중적으로 진출한 것이 파친코나 식당, 그리고 연예계, 스포츠 분야였다. 그래서 일본연예계나 스포츠 톱스타 중에는 유난히 재일동포 출신들이 많다.

그렇지만 경제계에는 롯데그룹의 신격호씨 외에는 재일 동포로서 성공한 예가 거의 없었다. 그런만큼 일본 금융계에서 재일동포, 그 것도 20대 초반에 불과한 손정의에게 선뜻 사업자금을 빌려줄 리가 만무했다. 조건도 최악이었다. 무담보, 무보증, 저금리로 돈을 빌려달라는 것.

손정의는 어떡하든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려야 했다. 그래서 샤프사의 사사키 전무를 찾아갔다. 사사키전무는 어떻게 보면 오늘날 소프트뱅크, 즉 손정의를 있게 한 시금석이 된 인물이다.

그는 찾아가서 사업계획을 자세히 설명한 후,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은행 보증을 서 주십시오!”


(계속)

 

(출처:제이피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