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영화 프로듀서로 유명한 '치바 요시노리(千葉善紀)' 씨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서양인이 일본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3가지는 '닌자', '스시', '게이샤'라고 말했다. 치바 씨는 아예 그런 선입견을 판매전략으로 내세운 '스시 타이푼'이라는 영화 브랜드를 만들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 한국인의 입장에서 일본하면 떠오르는 가장 큰 선입견은 무엇일까? 난 여기에 '일본인들은 질서의식이 높기 때문에 줄을 잘 선다'를 넣어볼까 한다.
물론 일본인은 줄을 잘 선다. 단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붙는다. 줄을 잘 서야 하는 곳에서만 잘 선다는 것이다. 이 일본의 줄서기 문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인에게 모범적인 선진국민의 행동으로 꼭 배워야 할 문화로서 인식되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미련할 정도로 순박한 일본인의 표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줄서기 문화에는 일본의 여러가지 문화와 사회적 문제가 복합적으로 투영되어 있다.
우선 줄을 왜 서는가부터 이해해보도록 하자.
새로운 게임기나 신작 게임 소프트가 나올 때 전날부터 길게 줄서 있는 행렬은 수도 없이 전파를 타고 TV에 보도되었다. 코미케(코믹마켓)나 게임쇼 등의 행사장 앞에 오픈 전부터 길게 줄을 선 모습도 많이 보도된 것이다. 인기 라면집 앞에 1~2시간씩 줄을 서서 라면을 먹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줄을 서는 이유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지?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면, 플레이스테이션3 발매 당일에 필자도 전날 저녁부터 밤새도록 줄을 서서 구매를 했다. 아이패드 발매 당일에도 필자 역시 전날 저녁부터 밤새도록 줄을 서서 구매했는데, 필자야 취재를 위해서 그 이벤트를 체험한 것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런 판매 이벤트에 굳이 손님을 줄을 세울 필요는 없다.
왜냐면 팔 수 있는 기계의 대수는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줄을 서는 가장 큰 이유는 기계의 수급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첫날 입수하지 못하면 장기간 구매할 수 없다는 우려감 때문이다. 남들보다 먼저 손에 넣고 싶은 마니아 심리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한동안 구입하기 힘들까봐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판매하는 매장에서는 결코 '몇번째 손님까지 구매가 가능하니까 그 뒤에 선 분들은 돌아가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결국 줄에서 몇 번째 손님까지 구매가 가능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하염없이 밤새도록 줄을 서는 방법 이외에는 없다. 줄을 서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종의 배율이 낮은 도박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필자는 Wii의 발매 당일에도 똑같이 전날 저녁부터 아키하바라에서 줄을 섰다. 그런데 이 때는 매장에서 나와서 줄을 선 사람들 중 정해진 인원에게만 '정리권(整理券)'을 주고 손님들을 해산시켰다. 당연히 Wii 발매 당일에는 어느 곳에서 긴 행렬은 없었고, 정리권을 받은 손님은 아무 때나 와서 정리권만 내밀면 Wii를 사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두 가지 케이스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다. 앞서 예를 든 플레이스테이션3의 경우는 매장 측에서 줄을 선 손님에게 반드시 구매할 수 있다는 책임있는 선언을 하지 않은 것이고, Wii의 경우는 매장 측이 정확하게 몇번째 손님까지 판매를 하겠다는 책임있는 선언을 한 것이다. 어차피 줄을 설 필요가 없으면 줄을 서지 않는건 당연하겠지만, 플레이스테이션3의 사례처럼 매장이 책임 회피를 하려고 해도 끝까지 줄을 서는 이유는 그 '줄을 섰다'라는 행위가 정당한 클레임의 사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인들이 줄을 서는 문화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암묵적으로 동의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는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조금만 관점을 바꿔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유명한 라면집에서 줄을 설 때는 먼저 자리를 잡고 줄을 선 사람에게 우선권이 있다. 그리고 만약 새치기를 하게 된다면 줄을 선 수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게 된다. 이 줄을 서는데 있어서는 월급을 1000만엔 받는 사람과 20만엔 받는 알바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줄을 선다는 행위로 인해 바로 그 장소의 룰 안에서 구성원들 전체는 공평해진다. 만약 거기서 룰을 어기는 자가 나오면 다수에 의해 퇴출을 당할 수밖에 없다. 제 아무리 잘나고 돈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소용 없다. 그저 먼저 줄 선 인간에게 우선권이 주어지는 만인이 평등한 작은 사회가 그 속에 만들어져 있을 뿐이다.
그러니 밤새워서 줄을 섰는데도 플레이스테이션3를 팔지 않는다면 이것은 주최 측이 엄연한 룰 위반을 한 것에 해당한다. 못 팔 것이었으면 미리 말해줬어야만 한다. 그러니 밤새워 줄을 서고도 구매를 하지 못한 사람은 갑의 입장에서 정당한 클레임을 걸 수 있다. 개인은 약해도 같은 입장에 처한 집단은 강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갑의 입장에 설 수 있다.
또 줄을 서면 아무리 뒤늦게 와서 제일 끝에 섰더라도 주최 측(가게나 매장 등)에서 최후열(最後列) 깃발을 세우기 전까지는 언젠가는 줄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똑같은 결과물을 받을 수 있다.
기다리면 언젠가는 라면을 먹을 수 있고, 언젠가는 게임기를 살 수 있고, 언젠가는 소프트웨어를 살 수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 순서가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자기 순서가 돌아온다'는 것이 일본인의 삶 그 자체를 투영한다.
지금은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평생고용과 연공서열 제도로 인해서 회사에 들어가서 큰 사고만 치지 않으면 언젠가는 승진되고 월급도 착실하게 오르며 대열에서 이탈할 일도 없었다. 순서는 늦어질 수도 있지만 자기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일은 어지간한 사고치지 않고는 없었던 것이다. 직장에서의 생활 그 자체가 아주 긴 시간을 둔 줄서기와도 같았다.
물론 이런 문화는 직장 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수없이 비판받고 있는 일본의 '윳토리 교육(경쟁을 없애고 number one이 아닌 only one의 인간을 키운다는 교육 이념)'도 이런 정서에 기반한다고 할 수 있다.
줄서기는 또 다른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바로 '대세를 따라야만 하는 일본인의 조급함'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인에게 '조급함'은 왠지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일본 사회는 매우 여유롭고 느리게 돌아갈지 몰라도 일본인들은 정서적으로는 매우 큰 조급함을 느낀다.
조급함의 정체는 바로 대세를 따라야만 한다는 긴장감이다. 일본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사회 전체적으로 무언가 한쪽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가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게임 소프트인 드래곤퀘스트가 나오면 누구나 드래곤퀘스트를 해야만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형성하고, 최근에는 게임 소프트 몬스터 헌터가 수백만장 팔리면서 누구나 몬스터 헌터를 해야만 하는 듯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90년대 후반에 우타다 히카루가 붐이었을 때는 누구나 우타다 히카루의 CD를 사야만 하는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모노노케히메가 상영중일 때는 누구나 세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2번 이상은 봐야만 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갔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하면 왠지 마케구미(負け組, 패배자 그룹)이 되는 것만 같은 고민에 빠지게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행렬이 생기는 가게에서 라면을 먹어보지 않았다면 라면 맛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일본인들의 정서에는 사회적인 이슈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결코 마케구미 노선을 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자리잡고 있다.
일본의 줄서기 문화가 질서의식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한번 코미케나 원더페스티발 같은 대규모 마니아 이벤트에서 직접 줄을 서보시길 바란다. 입구에서부터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 있지만, 이벤트가 시작되고 입구 문이 열리는 순간 자기가 원하는 부스로 달려가서 자리 잡기를 먼저 하려는 카오스의 순간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글 | 김상하(프리 라이터)
(출처: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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