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이야기

주위 만류에도 내가 일본에 돌아온 이유... / (유재순)님의 글입니다.

가자 세계로 2011. 3. 22. 12:30

"죽고 싶어? 왜 자진해서 사지로 가려는겨. 안가믄 안뎌? 꼭 가야 뎌? 애들은 즈이들끼리 나오라고 하면 되잖어."

몇 날 며칠을 나만 마주치면 우리 엄마는 이같은 대사를 읊고 또 읊었다. 나중에는 서울에 들어온 뒤 생활 걱정 때문에 그러는 줄 아시고, 무조건 한국에 들어오기만 하면 당분간은 생활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뉘앙스까지 넌지시 띄우셨다.

그리고 17일 오후 4시 30분,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타기 전 휴대전화 전원을 끄기 직전까지 전화벨은 계속 울렸다. 전화내용은 우리 엄마와 거의 대동소이했다. 고등학교 친구는 일본가서 큰일 나면 어떡하느냐고 30분 단위로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통화 내용만으로 생각한다면 내가 꼭 전쟁터로 나가는 모양새다.

그러고 보니 김포공항에서 수속할 때도 3,40여 분간 한국인을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마감 시간이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었는데도 출국 카운터는 한산했다. '혹시 그 큰 비행기를 나 혼자 타고 가는 것 아냐?'하는 생각이 순간 머리에 스칠 만큼 정말 너무나 한산했다. 다행히 보딩패스를 받고 비행기에 오르니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았지만 그렇다고 소수 정예 인원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고 입국수속을 밟으면서 기가 막힌 광경과 조우했다. 딱 7명. 일본에 입국하는 한국인이 총 7명뿐이었다. 지난 30여 년간 백번도 넘게 일본을 드나들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외국인 수속 창구에 선 7명의 한국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멋쩍게 웃었다. 샐러리맨인듯한 30대의 청년이 중년 부부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 일본으로 여행을 다 오세요?"       
"여행은요. 우리 아이들 데리러 온 거예요. 들어오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안 들어와서 잡으러 왔어요. 그런 총각은 일본엔 왜 들어오슈?"
"직장이 도쿄에 있어서요."

그러자 즉각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래도 사람 목숨이 더 중요하지…."

입국 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기 위해 수화물 수취대로 갔다. 그런데 아뿔싸! 내 짐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대형 화장지가 적나라한 모습으로 노끈에 묶인 채 말이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며칠 전 동북지방 대지진의 여파로 도쿄시내 생필품이 동났다는 소식을 도쿄에 있는 편집부 기자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런데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노파심에 다시 한번 도쿄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니 아직 화장지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마침 엄마 집에 뜯지 않은 대형 화장지가 있길래 그대로 들고 일본에 온 것이었다.

수화물 수취대에서 내가 화장지를 끌어내리자 일본여성 서너 명이 내 옆에 서 있다가 신기한 듯 물었다. 어디서 산 거냐고. 아마도 공항에서 산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들은 만약 공항에서 화장지를 팔았다면 자신들도 샀을 거라면서, 다른 쇼핑보다 지금은 화장지가 더 필요할 때라면서 좋겠다고 말했다.   

수화물검사대에서도 화장지는 또 한 번 웃음거리가 되었다. 중년의 남성 담당자가 카터기에 실린 대형 화장지 묶음을 보고는 기가 막힌지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다른 짐을 손으로 가리키더니 자신있게 "이거 모두 먹을 거죠?" 라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컵라면 2박스, 김 1박스, 건빵 20봉지, 우비 20개, 미숫가루, 생선통조림, 햄, 오징어, 창란, 명란 젓갈 20kg, 대형 양초 6개(정전대비용), 마스크 50개, 김치, 화장지 등 정확히 87kg(항공사 무게)이나 되는 무지막지한 짐꾸러미였다. 기내에 들고 들어간 7-8권의 책까지 합하면 거의 100kg에 가까웠다. 이 모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비상식료품이었다. 만약 또한번 대지진이 일어나 피난생활을 하게 되면, 오니기리(삼각밥)와 함께 먹을 작정이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는 달리 반찬이 없으면 밥을 잘 먹지 못한다. 그래서 일본식당은 별도로 주문하지 않는 이상 반찬이 따로 나오지 않지만, 한국식당은 기본적으로 이것저것 밑반찬이 나온다.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들은 튀김, 간절임종류 등 평소 마른 반찬을 익숙하게 먹지만, 한국인들은 나물무침처럼 양념에 버무린 반찬이나 국물종류의 반찬이 없으면 매우 뻑뻑해 한다.
 
바로 이런 식생활 습관 때문에 나는 중부시장에 가서 쉽게 상하지 않고 오래 저장이 가능한 젓갈종류와 김, 그리고 물만 부으면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을 두 박스 샀다. 최악의 경우 주먹밥에 젓갈을 넣고 김으로 싸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짐이 가히 이삿짐 수준에 가까웠다.
 
수화물 담당자도 이 같은 내 짐에 기가 막혔는지 그냥 빙그레 웃었다. 아니 노끈으로 묶은 대형 화장지를 보고 웃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평소 같으면 짐이 워낙 많아 이 가방 저 가방 쿡쿡 찔러가며 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을텐데, 이날은 피식 웃으며 그냥 나가라고 했다.
 
신주쿠역까지 가는 리무진버스를 탈 때도 많은 짐은 웃음거리가 되었다. 리무진버스 화물담당자가 다시 내게 물은 것이다. '이 짐 모두 한국에서 온 것입니까?'라고. 특별히 화장지를 가리키면서까지 말이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말해줬다.
 
"글쎄 사무실에서 며칠째 화장지를 못 구했다네요."
 
내딴에는 짐이 너무 많아 미안해서 한 소리였다. 그랬더니 그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사실 우리집에도 화장지가 떨어졌습니다. 사질 못해서요."
"하나 드릴까요?"
 
실제로 내가 화장지를 꺼내려고 하자 그 화물담당자는 당황한 듯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그 역시 처음보는 이 상황에 어이없는 듯 황당한 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신주쿠역에서 택시를 타고 니시와세다에 있는 집으로 오는 길에 마침 신주쿠타운인 쇼쿠안도리를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이미 어둠이 내린 저녁이어서 평소의 쇼쿠안도리라면, 한국식당이나 한류숍 간판의 네온싸인이 휘황찬란하게 번쩍이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날은 을씨년스럽고 어둠컴컴했다.
 
자세히 보니 문닫은 식당이 꽤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못 볼 것을 본듯한 느낌이었다. 한국사람들 왜 이러나.
 
집에 오니 중3 딸아이가 짐정리를 하는동안 내내 내 허리를 껴안고 놓지를 않았다.
 
"엄마 못 보고 죽는줄 알았어. 처음 지진 왔을 때 얼마나 무서웠다구. 그래서 막 울었어. 너무너무 무서워서. 10년 넘게 일본에 살면서 그렇게 크게 흔들린 지진은 처음이었어."
 
대지진 당시 도쿄 지역 진도는 '5도 강'이었다. 내진 설비가 구비되지 않은 건물의 경우 금이 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흔들림이다.
 
내 딸아이는 울면서도 학교에서 배운대로 지진이 날 때마다 화장실로 뛰어갔다고 했다. 화장실에 가보니 절로 웃음이 피식 터져나왔다. 화장실 한켠에 물병, 라면, 라디오가 놓여져 있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라고 했다. 같은 맨션에 사는 한국인 두가구는 이미 서울로 떠나고 없었다.
 
이튿날 18일, 딸아이의 니시와세다중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졸업식이 일제히 취소된 대학과는 달리 오전 10시, 예정대로 식은 진행되었다. 외부손님도 신주쿠구청장 등 50여명 가까이 참석해, 사회를 보는 선생님의 말씀대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학부형들도 거의 다 온듯했다. 
 
교장 선생님은 한 명 한 명 일일이 다 호명하여 졸업장을 나누어 주었으며, 식이 끝난 후 운동장에서 학부형들이 긴 터널을 만들어 졸업생들을 축하하는 화기애애한 세레모니도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진행됐다. 그리고 학교 옆 토야마 공원으로 졸업기념 사진을 찍으러 우르르 몰려가는 광경도 예년과 다를바가 없었다.
 
나는 토야마로 향하는 학부형들의 행렬에서 빠져나와 근거리에 있는 한인타운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우선 최근 일본인들이 많이 몰리고 있는 오오쿠보도리로 갔다. 그곳은 낮이나 밤이나 일본인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그래서 거기서 한국식당이나 한류숍을 하는 한인들은 자루에 돈을 긁어 모은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오오쿠보도리 중간지점에 오자 아는 한국식당에 안내문이 붙여 있었다.
 
<지진 때문에 오늘은 영업중지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서너 집 걸러 한 집씩 이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어떤 식당은, 식당 바로 앞에 밑반찬을 팔기 위해 내놓았던 나무의자를 그대로 수북히 쌓아놓고 임시휴업을 해버려, 그모습은 흡사 흉물스런 폐점같아 보였다.
 
한 블록을 지나 쇼쿠안도리에 가보았다.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대형 갈비집과 한국가정요리 전문 식당, 두개의 분식 전문점, 한국 전문서점이 문을 닫고 있었다. 거기에는 약속이라도 한듯 똑같이 아래와 같은 문구가 붙여져 있었다.
    


<늘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동북대지진에 의해 당분간 영업을 보류하게 되었습니다. 폐를 끼치게 되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시 방문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동북관동대지진의 영향으로 수일간 임시 휴업하기로 하였습니다. 손님들에게 폐를 끼치게 돼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진 영향 때문에 오늘은 임시 휴업합니다.>     
 
그래서 해당 식당 K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다. K사장은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종업원들이 위험하다고 한국을 가겠다는데 말릴 수가 있어야죠. 생명을 담보로 하는 것이니. 식당업주 입장에서 왜 영업을 안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주방장과 종업원이 있어야 손님을 받지요. "
 
몇 사람에게 더 전화를 걸어 보았다. 대답은 거의 비슷했다. 11일 지진이 난 후, 원전마저 위험하다는 뉴스가 나오자 너나할 것 없이 우르르 한국으로 떠났다고 했다. 쇼쿠안도리에서 일하는 주방아주머니 몇 명은, 타국에서 '개죽음 당하기 싫다'며 무조건 짐을 싸들고 공항에 나가 '캔슬마치(예약 취소 대기)'를 했다가, 기어코 그날 일본을 떠났다고 한다.
 
이같은 위기의식은 11일부터 15일 사이에 쇼쿠안도리와 오오쿠보도리의 한인타운에 들불처럼 삽시간에 퍼져, 한때는 서울행 비행기 티켓이 25만엔까지 치솟을 정도로 불안이 극에 달했다고 한다.
 
"떠난 이들 대부분은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온 사람들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돈버는 것 빼놓고는 그다지 일본에 대해 미련이 없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뒤도 안돌아보고 일본을 떠났죠. 하지만 종업원들 경우는 대부분 유학생들이예요. 그들은 부모들의 성화에 못이겨 떠난 이들이 많아요. 일부 유학생은 걱정하는 부모들을 진정시켜놓고 다시 일본에 돌아오겠다면서 떠났구요. "
 
하지만 한국으로 떠난 주방 아주머니들과 종업원에 대해 분노를 숨기지 않는 식당 주인도 있었다.  다행히 한국으로 떠난 종업원이 많지 않아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횟집 L사장은 기자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다시 돌아오면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겁니다. 우리 식당이 이바라기현 정도에 있었다면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여기는 도쿄예요. 수 천만 명이 도쿄에 그대로 있는데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무책임하게 혼자 살겠다고 떠난 사람 다시 받아 줄 필요가 없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합니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같은 한인사회의 극단적인 상황과는 아랑곳없이 한류숍이 대지진 여파에도 불구하고 성황중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류숍 모두가 손님들로 꽉 찬 것은 아니다. 하지만 쇼쿠안도리나 오오쿠보도리 대형숍에는 대지진 전과 다름없이 일본여성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이 광경이 오히려 신기했다. 돈 벌겠다고 일본에 한류 좌판을 쭈욱 펴놓은 한국인들은 저마다 살겠다고 한국으로 대탈출(?)을 하는데, 정작 대지진 피해당사자라 할 수 있는 일본인들은 태연하게 한류숍에 와서 쇼핑을 하고 한국음식을 먹으며 '한국'을 즐기고 있으니.
 
17일 도쿄에 돌아온 이후, 내 핸드폰은 하루에도 몇차례나 충전해야 될 정도로 쉴새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한국에서 전화한 이들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시간이라도 빨리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라'는 말이었고, 반면 일본에 있는 한국인 지인들은 '다른 사람들은 일본을 못 떠나서 한인데 왜 거꾸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지에 돌아왔느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동안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사무실, 혹은 집 부엌에서 심한 어지럼증을 느낄만큼 건물 전체가 수십초간 흔들흔들거렸다. 그렇게 며칠동안 수 십여 차례 여진이 있었다. 
 
내가 동북대지진이 일어난 후, 지진보다도 더 위험하다는 원전사태에, 그리고 우리 엄마와 7남매 형제들, 친구들이 극구 만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에 돌아온 것은 딱 세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내아이들 남매가 일본에 남아 있었고, 두번째는 일본뉴스를 그대로 전달하는 제이피뉴스 때문이었고, 세번째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의리'혹은 '신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학교를 다닌 중3 딸아이는 국내로 들어오라는 친척들의 성화를 한마디로 거절해버렸다.
 
"여기 일본사람들도 그대로 있어요."
 
지금도 딸아이는 한국에 도피해야 한다는 의식이 눈꼽만큼도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사람들도 아직 그대로 생활하고 있는데 왜 미리 겁먹고 도망을 가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딸아이는 학교에서 철저하게 배운 그대로, 화장실에 물과 라디오 등 비상물품을 비치해 놓았다. 특히 원전에 대한 뉴스와 날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꼼꼼히 챙겨본다.
 
두번째 이유인 제이피뉴스는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뉴스를 전달하는 일본전문 매체다. 그런만큼 본사 사무실이 도쿄 신주쿠구 와세다대학 앞에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일본전문 매체이므로 어떤 상황에 부닥치더라도 제이피뉴스 사무실과 기자들은 일본에 있어야 옳다.
 
일부 한국인 지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선 즉시 일본을 떠나라. 무엇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해 인터넷 서핑으로도 임시방편이나마 일본에 대한 기사를 왠만큼 쓸수가 있다. 그러니 하루빨리 일본을 떠나라. 사람이 먼저 살고 그 다음에 제이피뉴스도 있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재 도쿄에서 기사를 쓰고 있지만 현장에 다녀온 것도 아니다. 아니 갈 수가 없다. 제이피뉴스 기자 4명이 특별취재팀을 구성해 비상식품, 피해자를 위한 컵라면 2박스, 각종 구호품, 렌트카까지 빌려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현장에 가는 도로가 모두 막히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때문에 일본언론이나 TV뉴스, 그리고 한국지인의 말마따나 일본인터넷 뉴스를 실시간으로 체크해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그렇지만 현장의 분위기를 알고 느끼고 쓰는 기사와, 단지 외국에서 자료를 토대로 쓰는 기사는 그 차이가 천양지차로 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현지에서 쓰는 기사는 비록 현장과 거리상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지진 피해자들과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로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로 전혀 다른 뉘앙스의 기사를 쓸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인터넷 자료로 기사를 쓴다면 그저 단순히 '펙트'만을 전달하게 되지만, 지금처럼 일본에서 기사를 쓰면  '펙트'외에 일본인들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그들의 표정을 시시각각 생생하게 그대도 전달할 수가 있다.
 
바로 이 이유가 나와 제이피뉴스 기자들이 일본에 있는 이유다. 물론 우리 제이피뉴스 사무실에도 대지진 여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기자 두명이 회사의 의지에 상관없이 피난(?)을 갔다.
 
히로시마 출신 일본기자 한 명이, '자신은 피폭경험이 있는 히로시마 출신이라 무엇보다 원전사고가 무섭다'며 실제로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14일 히로시마에 내려갔다. 
 
또한, 한국인 기자 한 명도 서울에 사는 부모의 눈물겨운 호소에 못이겨, 16일 비행기 좌석이 없어 오사카에서 하룻밤을 자고 한국에 들어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부모의 설득내용이었다. 아직 미혼인 그가 자칫 많은 양의 방사선을 쬐게 되면 불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하루빨리 한국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서울에 있을 때도 하루에 수십번씩 듣던 내용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암과 불임증에 걸릴 것처럼 많은 한국인들이 동요했던 소문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이나 혼전을 앞둔 미혼들은 남녀 할 것 없이 부모들이 조바심을 냈고, 그 결과 '도쿄대탈출'이라는 미션을 낳았다.
 
그리고 내가 일본에 돌아온 세번째 이유는 일본인에 대한 '의리' 혹은 '신뢰'다.
 
80년 대초, 내가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살 때다. 당시 잡지사에 다니다가 전 두환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자, 나는 차라리 난지도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편이 기사검열보다 더 낫겠다 싶어 난지도 생활을 시작했다. 낮에는 쓰레기 매립장에서 쓰레기를 줍고, 밤에는 개척교회를 빌려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을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일종의 야학이었다. 이것도 나중에는 전두환정권이 과외공부라고 하여 강제로 폐쇄조치됐지만.
 
그런데 1년 후 생활비가 궁해 '신동아논픽션' 모집에 응모, 당선된 후 나는 엄청난 후유증에 시달렸다. 당시 쓰레기를 줍던 일부 난지도 사람들이 '난지도를 이용하여 유명해지고 돈벌었다'며, 같이 쓰자고 인세와 원고료가 나올때마다 손을 벌리는 바람에 내 수중에 남는 돈이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그들의 말이 맞는 말이기도 해 편안하게 함께 나누어 썼다. 
 
당시 혜화동에 사는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이 나를 찾아왔다. 난지도에서 생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몇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난지도에 사는 것뿐만 아니라 진짜 쓰레기를 주워야 한다고. 그리고 전도는 하지 말고 그저 이 사람들 옆에만 있어 달라고. 그냥 친구로서 함께 생활해 달라고 말했다. 그러면 전도하는 것보다 휠씬 더 큰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이 말한 것은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 당시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는 서너 개의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 교회가 모두 한 교회에서 불화를 겪고 파생돼 나간 것이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쓰레기를 주워서 그걸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극빈한 집성촌에서, 교회라는 곳은 내부에서 서로 할키고 싸우다가 결국에는 바로 옆에 또 하나의 교회가 세워지는 웃지 못할 그런 환경. 1년 사이에 어느새 서너 개의 십자가가 쓰레기 매립장 위에 세워지는 촌국이라니. 게다가 그들은 전도사 혹은 목사님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쓰레기 매립장 근처에는 오지도 않았다. 그냥 선비처럼 예배만 봤다.
 
나는 그것이 용서가 안됐다. 비록 그들이 주님의 종인 목사나 전도사일지라도 난지도에서마저 그러면 안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쓰레기를 줍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니나다를까. 나와 함께 쓰레기를 줍던 신혼의 한 여성이 신학대학에 다니는 전도사 남편을 위해 생활비를 벌다가, 그만 불도저에 깔려 온몸이 으스러진 채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녀의 남편은 신학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전도사라는 명목으로 늘 교회 방바닥에 누워 빈둥거리며 놀던 사람이었다. 
 
결국 부인은 비명횡사했고, 내가 이 이야기를 여성동아에 쓰자 그 남편은 여성동아 편집실과 우리집에 찾아와서 크게 행패를 부리고 돌아갔다.
 
그래도 난,  후진하는 불도저에 몇 번 부딪쳤지만 용케도 이마 옆 머리를 일곱바늘 정도 꽤매는 상처를 입는 선에서 무사했다. 지금도 만지면 얼얼하지만, 그러나 그녀는 쓰레기 줍는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그대로 후진하는 불도저에 정면으로 깔려 버린 것이다. 한 극빈자의 비애였다. 왜냐하면 그녀가 뒷벌이가 아닌 앞벌이 쓰레기를 주었더라면 그렇게 처참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쓰레기 매립장은 앞벌이와 뒷벌이로 나뉘었다. 앞벌이는 잘 사는 지역의 구청별로 수십만원의 권리금이 붙었다. 잘 사는 동네의 쓰레기는 돈되는 물건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중 강남구와 서초동, 성북구청 쓰레기의 앞벌이가 가장 비쌌고, 변두리 지역의 쓰레기는 그만큼 권리금 액수가 낮았다.
 
뒷벌이는 바로 앞벌이가 한번 줍고 난  그뒤를 다시 파헤쳐 팔만한 물건을 줍는 것이었다.
 
그 때 산만한 쓰레기 더미를 불도저가 한 번 씩 가운데를 지나가며 반으로 갈라 놓는데, 뒷벌이로서는 그런 불도저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쓰레기더미 속을 파헤쳐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 뒷벌이를 하다가 한 여인이 죽고 난 뒤여서 나는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에게 그 같은 조건을 내건 것이었다. 그 약속을 조건으로 수녀님들이 살집을 소개해줬다. 실제로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은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 그들과 똑같이 쓰레기를 줍고 살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찾아 주셨다. 그때 추기경께서는 우리에게 '당신들은 주위 형제 자매들을 위해 여기에서 생활한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은 당신 자신을 위해, 자신에게 만족하기 위해서 여기서 쓰레기를 주워 주위를 돕는 것이다'라고 일침을 놓으셨다.
 
내가 이렇게 과거 경험을 장황하게 늘어 놓은 것은 바로 '친구 곁에 있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과거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서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살 때, 내가 시내를 나가면 냄새 때문에 모두 나를 피했다. 아무리 깨끗하게 빨아 입고 나가도 버스를 타면 승객들이 코를 막고 저쪽으로 갔다. 누군가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표현이 딱 맞을 정도로 쓰레기 매립장에서 생활한 이력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도 냄새라는 표시가 났으니 말이다.  
 
그래도 내 경우는 평생 그곳에서 살 것도, 또한 당장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보통의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였다. 하지만 생계 때문에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사는 사람들은 그곳이 삶의 터전이었다. 그들은 2년 가까이 내가 그들과 함께 쓰레기를 주워 먹고 살자 괜히 고마워하며 아줌마 아저씨들이 번갈아가며 매일 박카스 한병씩을 사다 주었다. 지금도 재미있는 추억이긴 하지만, 한 불도저 아저씨는 매일 밤 야학하는 교회로 찾아와서는 결혼하자고 졸라대기도 했다.   
 
이렇듯 가장 어렵고 힘들다고 느낄 때,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될 때가 있다. 누군가 내 옆에 있어 준다는 것, 특히 이번 대지진과 같은 대참사가 일어났을 때, 도망가지 않고 묵묵히 내 옆에 있어 준다는 것. 그런 이웃이, 그런 친구가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삶의 의욕이 생길 수도 있다 .
 
혹여 일부 사람들은 목숨부터 부지한 다음에 친구지 무슨 의리타령이냐 할 지 모르지만, 이번 도쿄의 경우는 달랐다. 한국 사람들이 당장 일하던 일터를 내팽기치고 도망치듯 황망하게 일본을 빠져나가야 할만큼 도쿄는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은 아니었다. 그것은 현재의 이 현실이 고스란히 증명해 주고 있다.
 
물론 위험했다. 일촉즉발의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원전 현장에서는 50여 명의 일본인이 대형사고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이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고, 3천만 명이 넘는 도쿄도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감 속에서도 그들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인내했다.
 
더욱이 한국에 돌아간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인들이 주 고객이다. 그렇다고 도쿄도에 비상사태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극도의 불안과 위기감을 느낀 것은 충분히 이해하나, 하루아침에 일하던 터전을 버리고(?) 도망치듯 한국으로 탈출할 그런 위험한 상태는 결코 아니었다.
 
한국인이 느끼듯, 도쿄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상태였다면, 정말로 그랬다면 3천만 명의 도쿄시민들도 덩달아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탈출을 감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쿄시민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내심 불안감은 컸지만 일터를 버리고 황급하게 떠나야 할 그런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대거 떠났다. 고객에게 '지진 때문에 임시휴업을 한다'는 단 한장의 알량한 안내문을 붙이고서 말이다.
 
이제 이들은 조만간 다시 일본으로 돌아올 것이다. 살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서. 문제는 나중에 나만 살겠다고 친구들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이 무슨 낯으로 일본인 고객들과 친구들의 얼굴을 대하느냐는 것이다. 이들은 앞으로 일본인들과 거래를 해야 하고 또 그들을 상대로 음식을 팔아야 한다. 
 
일본인도 사람이다. 감정있는 인간이다. 자신의 혼네(본심)를 표현하지 않는 일본인들이라고 해서 감정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어제 서울에서 일주일전 한국으로 도피했던 유학생부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도쿄 상황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 걸려온 전화였다. 나에게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물었다. 도쿄로 돌아가자니 불안하고, 그렇다고 한국에서 계속 눌러 앉기에는 딱히 할 일도 없고, 그리고 미래가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해줬다. '앞으로 일본에서 계속 살 계획이라면, 특히 일본인 친구들을 잃고 싶지 않다면 하루 빨리 도쿄로 돌아오라'고. 일본인 친구들이 '배신감'을 느끼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돌아와 일상생활에 복귀하라고.

그러면서 며칠 전 일본 언론사에 근무하는 기자친구가 내게 한 말을 들려줬다. 언론사 친구는 서울에서 돌아온 내게 조금은 빈정대는 투로 '다른 한국인들은 모두 도쿄를 떠나는데 너는 왜 돌아왔느냐'고 핀잔하듯 물었다.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너도 여기에 그대로 있잖아. 그러니까 돌아왔지. 왜 내가 돌아온 게 싫으냐?'고 짐짓 삐친척하고 묻자, 그는 정색을 하면서 금세 밝은 목소리로 '아리가토(고마워)!'라고 말했다.
  
나는 '고맙다'는 이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다고 생각한다. 맨처음 퉁명스럽게 날 대한 것은 반가움에 그랬다는 것을 나중에 그가 얘기해줘서야 알았다.  
 
아무튼 최소한 일본에서 일을 하고, 또 일본인들을 상대로 거래를 하고 비지니스를 하는 한국인이라면 적어도 최소한의 기본적인 의리를 지켜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그렇다고 거창한 일도 아니다. 그저 일본인들과 똑같이 일상생활을 영위해나가면 된다.
 
일본인들이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이웃이 되어 준다는 것, 친구가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은 장기간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우리의 최소한의 의무가 아닐까? 가만히 옆에 있어주는 것, 그들 곁에서 이탈하지 않고 이웃으로 남아 있는 것.
 
하지만 이미 한국인과 일본인들 일부에서 이반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쇼쿠안도리에서 한국식당을 하고 있는 몇몇 주인들은, 주방장이나 종업원이 돌아온다 해도 다시 받아 줄 의향이 전혀 없다고 못박았다. 또한 한국식품회사와 거래를 하고 있는 일본인 주류도매업자는, 한국인에게 많이 실망을 했다고 노골적으로 섭섭함을 내비쳤다.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한류바람을 기반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낯선 타지에서 24시간 고군분투를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적잖이 부를 쌓은 사람도 있고, 또 일정부문 일본사회에서 인정을 받은 한국인도 많다. 그런데 이같은 노력이 자칫 잘못하면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번 '신뢰'를 쌓기는 어렵지만 일단 굳게 쌓아놓으면 왠만해서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 일본인이다. 우리는 수 십년간의 일본생활에서 그런 일본인들의 근성을 수없이 보아왔고 또 경험해 왔다.  
 
진정한 의미의 친구는 자신이 가장 어려웠을 때 적나라하게 나타난다고 누가 그랬던가.
 
현재 도쿄는 아직까지 평온하다. 절전정책으로 전철운행이 7,80%밖에 안 되고, 물과 식료품도 아직까지 품귀현상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도쿄시민들은 자기가 서 있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으로 느끼는 불안감을 스스로 다스리며, 후쿠시마 원전사태가 소강사태에 접어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그러는 동안 대일본 탈출을 감행했던 한국인들도 하나둘 원위치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때 그들은 일본인 친구들에게 뭐라고 말 할 것인가?

 

 

 

(출처:제이피뉴스, 유재순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