抵抗(烈士)의 땅 - 홍수전, 손문 그리고 모택동
中國에서 양쯔강, 황하에 이어 3번째로 큰 珠江의 연원이 되고 있는 五嶺산맥은 워낙 높아 중국대륙에 붙어있는 인도차이나 반도와 한반도 다음으로 외부세력의 침입이 용이하지 않아 지리적으로도 독립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역사적으로 중국 내 타 왕조의 망명정부가 많이 섰던 곳이기도 하다.
南宋 최후의 황제가 광주의 남쪽(지금의 홍콩 신계)으로 도망 와서 宋의 명맥을 유지코자 한 것, 明朝가 만주족에 쫓겨 남쪽으로 도망 왔다가 최후에는 이 지역에서 마지막 항전을 하였고 결국 吳三桂 등 청에 복속한 明의 장군들에 의해 진압된 곳도 이 지역이다.
청 말기에는 광주에서 북쪽으로 30km 떨어진 花현에서 홍수전의 太平천국의 난이 일어났고 60여 년 후 손문의 신해혁명의 근거지가 된 곳도 이곳이다.
손문은 광주시에서 남으로 70km 떨어진 香山, 지금의 中山에서 출생하여 홍콩의 中央書院(Queen's College)을 졸업하고 한 때 광주의 박제의 학교에서 수학하였다가 그 후 지금의 홍콩의과대학전신인 홍콩의 西醫書院을 졸업, 마카오에서 개업하였던 완전 광주인이었다.
그는 고향 광주에서 3번에 걸쳐 淸조정에 대항 무장봉기를 감행하였다.
1895년 10월 광주에서 1차 무장봉기를 하였으나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1900년 10월 광동성 동쪽 惠州에서 제2차 봉기를 하였으나 보급 난으로 다시 실패하였다.
1911(신해년)년 3월, 그는 외국에 있으면서 黃興을 시켜 제3차 봉기를 하였으나 혁명당 정예를 대거 희생시키고 또 실패하였다.
이 때 희생된 혁명당원 72인을 淸朝는 사형수가 묻히는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묻어버렸던 것을 익명의 화교가 광주의 白雲山(382m) 산록의 黃花崗 지역의 토지를 헌납하여 72명의 희생자를 合葬시켰다.
지금 그 곳의 도로를 先烈路라 부르고 "72열사의 묘"로 단장되어 있다.
그 해 11월 武昌에서의 무장봉기가 결국 성공하여 청조는 몰락하게 된다.
광주에는 72열사의 묘 근처에 "廣州起義烈士陵園"라는 또 다른 烈士의 묘가 있다. 이 烈士들은 1927년 12월 11일 중국 공산당 광주콤뮨이 무장봉기 하였다가 희생된 烈士들이다.
1927년은 중국공산당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그 해 4월 上海에서 백색테러라고 알려진 장개석 국민당에 의한 공산당원 기습체포 사건이 있었다.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른바 국공합작으로 북쪽의 군벌을 공격하고 있던 주은래 중심의 중국 공산당이 혼비백산 上海를 탈출하게 된다.
上海탈출에 성공한 주은래, 주덕 등이 8月1日 江西省 南昌에서 국민당에 대항 무장봉기를 하였다.
그날이 인민해방군 건군기념일이다.
그 무장봉기는 결국 실패하여 주은래 등은 인근 井崗山으로 도피하여 그에 앞서 들어온 毛澤東과 合流, 井崗山 투쟁이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중국의 공산혁명을 성공시킨 모택동에게도 광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글 유주열(수요저널 고문, 전 나고야 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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