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영화 감독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최근에는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영화가 많이 있다.
이번 인니뽄 심층분석에서는 감독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가 주목하는 일본의 영화 감독 10인을 단독적으로 선정하여 소개한다.
「세계의 쿠로사와」
사진출처; http://blog.livedoor.jp/kagome_2005/archives/cat_10003482.html
1. 쿠로사와 아키라
(黒沢明, 1910년3월23일-1998년9월6일)
도쿄도 출신.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郎), 미조구치 켄지(溝口健二),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거장 중의 한 명이다. 「세계의 쿠로사와」, 또는 타협하지 않는 철저함과 독재적인 행동에서 비롯하여 「쿠로사와 천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의 회원이며, 문화훈장수상자로서 도쿄도 명예시민이기도 하다. 1943년, 감독 데뷔작인『스가타 산시로(姿三四郎)』를 발표한 이후, 전쟁 전후에 걸쳐 사회적 휴먼 드라마를 차례로 발표하는 등, 토호(東宝)의 간판 감독으로서 활동하였다. 그 후 1950년의 작품 『라쇼몬(羅生門)』으로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감독으로 떠오른다. 이후에도 『살다(生きる)』(1952), 『7인의 사무라이(七人の侍)』(1954)등, 여러 작품이 국제적으로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 헐리우드와 이탈리아에서 쿠로사와 감독의 리메이크 영화를 제작하는 등, 세계에서 거장으로 인정 받은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이다.
「야쿠자 영화의 일인자」
사진출처; http://game.watch.impress.co.jp/docs/20010411/capcom.htm
2. 후카사쿠 킨지(深作欣二, 1930년7월3일-2003년1월12일)
이바라키현(茨城県) 미토시(水戸市) 출신. 1953년 토호 영화사에 입사하였으며 1961년 『풍래방 탐정, 붉은 계곡의 참극(風来坊探偵, 赤い谷の惨劇)』이라는 작품으로 감독 데뷔 하였다. 『긍지 높은 도전(誇り高き挑戦)』이라는 작품으로 주목 받기 시작하여 1973년에 시작한 『의리없는 전쟁(仁義なき戦い)』시리즈는 영화사에 남을 큰 화제를 일으켜 「실록 야쿠자 영화」의 일인자로서 부동의 지위를 얻게 된다. 그 이후에도 드라마『상처 투성이의 천사(傷だらけの天使)』, 『야규 일족의 음모(柳生一族の陰謀)』, 키타노 타케시가 출연했던『배틀 로얄(バトル・ロワイアル)』등 장르를 불문하고 자신만의 창작의욕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스가와라 분타(菅原文太), 치바 신이치(千葉真一), 사나다 히로유키(真田広之) 등 당대 최고 인기 배우를 작품에 기용한 것도 인기를 더했다. 쿠로사와 아키라의 뒤를 이어, 『토라! 토라! 토라!(トラ!トラ!トラ!)』(마스다 토시오(舛田利雄)와 공동작업)『간마 제 3호의 우주대작전(ガンマー第3号 宇宙大作戦)』, 『우주에서 온 메시지(宇宙からのメッセージ)』등의 작품은 미국에도 공개되었다. 또 만년에 발표한 『배틀 로얄(バトル・ロワイアル)』은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도 주목을 모았으며 홍콩에서는 흥행성적 1위를 기록하였다. 이 영화는 존 워 감독과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킬빌』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부인은 여배우인 나카하라 사나에(中原早苗)로 아들 후카사카 켄타(深作健太)도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국민영화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의 감독」
사진출처; http://www.news.janjan.jp/culture/0411/041108489/1.php
3.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1931년9월13일- )
오사카부 토요나카시(豊中市)출신. 만주 철도 기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만주에서 태어났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와 야마구치(山口)에 거주했다. 도쿄대학 법학과를 졸업 한 후 쇼치쿠(松竹) 영화사에 조감독으로 채용되어 1961년에 『2층의 타인(二階の他人)』이란 작품으로 감독 데뷔한다. 이후 쇼치쿠의 전통적인 인정극의 뒤를 잇는『시가의 태양(下町の太陽)』(1963), 『바보 드러내기(馬鹿まるだし)』(1964), 『바보는 전차를 타고온다(馬鹿が戦車でやって来る)』(1964), 『불면 날아갈 듯한 남자이지만(吹けば飛ぶよな男だが)』(1968)등의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였으며, 1969년 『남자는 괴로워(男はつらいよ)』시리즈를 시작하였다.
「일본 영화계에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다」
사진출처; http://mackychan.blog.ocn.ne.jp/scorsese/2009/08/81_c9f7.html
4. 오오시마 나기사(大島渚, 1932년3월31일 - )
오카야마현(岡山県) 타마노시(玉野市) 출신. 쿄토대학 법학부 졸업후 쇼치쿠사에 입사하여 오오바 히데오(大庭秀雄)의 조감독으로 일했다. 『사랑과 희망의 거리(愛と希望の街)』로 감독 데뷔 후 속편『잔혹한 청춘이야기(青春残酷物語)』(1960)으로 주목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후 『일본의 밤과 안개(日本の夜と霧)』(1960) 등의 작품을 통해 쇼치쿠 누벨버그의 귀수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밤과 안개』의 상영을 둘러싸고 회사와 분쟁이 생겨 61년에 퇴사하고 여배우였던 부인 코야마 아키코(小山明子)를 비롯하여 와타나베 후미오(渡辺文雄), 타무라 타케시(田村孟), 코마츠 호세이(小松方正), 토우라 롯코우(戸浦六宏) 등과 영화제작회사「창조사(創造社)」를 설립한다. 이후 AGT(일본의 영화회사중의 하나)와 함께『의식(儀式)』(1961), 『일본춘가(日本春歌考)』(1967), 『교사형(絞死刑)』(1968), 『소년(少年)』(1969)등, 국가와 소수파에 대해 다룬 작품을 차례로 발표하여 베네치아와 칸느 영화제에 초청 받는 등 호평을 얻었으며 『사랑의 투우(愛のコリーダ)』(1976)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일본 영화 최초로 하드코어 장르에 도전하여 여자가 지나친 사랑으로 남자를 살해하고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파격적인 실화를 기본으로 한 스토리는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켜 영국 영화비평가상 외국어 영화상, 시카고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그 후에도 『전쟁통의 메리크리스마스(戦場のメリークリスマス)』(1973)로 칸느 영화제 남우주연상, 영국 아카데미상 작곡가 상을 수상하였고, 『맥스 모나무르』로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또한 사회평론가, 해설가로서도 활약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하였다. 1996년 뇌출혈로 쓰러졌으나 1999년 『고핫토(御法度)』로 영화계에 복귀. 현재도 투병 생활 중이다.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사진출처; http://www.myfront.ne.jp/entry/bm-entry-57820.html
5.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 1941년1월5일 - )
도쿄도 출신의 애니메이션 작가 겸 영화감독, 만화가. 학습원(学習院)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 하고 토에이(東映) 애니메이션 제작 회사에 입사하였다. 1974년에 제작한 TV 애니메이션『알프스의 소녀 하이디』는 평균 최고 시청률 26.9%로 대 히트를 기록한다. 1979년에 발표한 영화감독 데뷔작 『루팡 3세 카리오스트로의 성(ルパン三世 カリオストロの城)』은 후에 애니메이션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러나 당시는 SF애니메이션 전성시대로 인기를 끌지 못하고 몇 년간 정체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시기를 지나1984년에 발표한 장편영화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風の谷のナウシカ)』는 대 히트를 기록하였고 이를 계기로 1985년에 애니메이션 제작회사 지브리 스튜디오를 설립하였다. 여기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천공의 성 라퓨타(天空の城ラピュタ)』(1986)、『옆집의 토토로(となりのトトロ)』(1988)、『마녀 배달부 키키(魔女の宅急便)』(1989)등의 히트작을 잇달아 발표하였고, 1997년에 공개된 『원령공주(もののけ姫)』는 일본의 영화 흥행 기록을 15만에 갈아치우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을 2001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이라는 자신의 작품으로 깨버림과 동시에 베를린 국제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아카데미상 장편 애니메이션부문 작품상을 수상하여 세계에서 인정받게 된다. 2005년『하울의 움직이는 성(ハウルの動く城)』으로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오젯라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아카데미상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로 올랐다. 다음해에는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최근작 『벼랑 위의 포뇨(崖の上のポニョ)』(2008)는 공개한지 한달 만에 흥행 수입 100억 엔을 돌파하는 등 흥행에 있어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05년 4월부터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임원직을 맡았다. 또한 감독 본인이 기획 개발한 미타카(三鷹) 모리 지브리 미술관(森ジブリ美術館)의 관장도 겸하고 있다.
「독특한 감성으로 만들어내는 (키타노 월드)」
사진출처; http://www.genkosha.com/cmblog/2009/01/_cm_1.html
6. 키타노 타케시(北野武, 1947년1월18일 - )
도쿄도 아다치구(足立区) 출신. TV프로 사회자, 개그맨, 영화 감독, 배우, 만담가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메이지 대학 공학부를 중퇴했으나 후에 명예 졸업생이 되었다. 아사쿠사(浅草)에 있는 스트립 쇼 극장「프랑스 좌(フランス座)」에서 코미디언으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기서 비토 키요시(兼子二郎)와 알게 되어 만담 콤비 “시비토”를 결성하여 당시의 만담 붐을 타고 큰 인기를 끌게 된다. 그 후 타모리, 아카시야 산마(明石家さんま)와 함께 「일본 개그맨 BIG3」로 확고한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TV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사회자, 작가, 배우, 가수, 도쿄 예술 대학 대학원(東京芸術大学大学院) 교수(2005년부터)로 활동했다.
또한 야구, 영화, 재즈 분야에 평론 서적을 내는 등 실로 다양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1986년 잡지사 「프라이데이」(흥미 위주로 연예인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잡지) 편집부를 습격한 사건과 1993년에 일어난 오토바이 사고로 인해 큰 부상을 입어 장기간 활동을 쉬게 된다. 이와 같은 긴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일본 연예계의 정점에 군림하고 있다. 영화감독 데뷔작 『그 남자 흉폭하다(その男、凶暴につき)』(1989) 은 원래 후카사쿠 킨지 (深作欣二)감독이 찍을 예정이었으나 스케줄 문제로 얼떨결에 메가폰을 잡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는 높은 평가를 받아 이후에도 영화감독으로서의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격한 폭력성을 고요하게 표현하는 작풍(作風)과 파란색을 강조한 독특한 화면(키타노 블루라고 부르기도 함)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 현존하는 일본인 감독으로서는 가장 지명도가 높다. 『3-4×10월』(1990),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あの夏、いちばん静かな海。)』(1991), 『소나치네(ソナチネ)』(1993), 『모두 잘하고 있어!(みんな~やってるか!)』(1995)、『키즈 리턴(キッズ・リターン)』(1996), 『불꽃 놀이(HANA-BI)』(1998), 『키쿠지로의 여름(菊次郎の夏)』(1999), 『BROTHER』(2001), 『Dolls』(2002), 『座頭市』(2003), 『TAKESHIS'』(2005), 『감독 만세!(監督・ばんざい!)』(2007)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2008년에는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특별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하다」
사진출처; http://asahi.co.jp/films/izutsu.html
7. 이즈츠 카즈유키(井筒和幸, 1952년12월13일 - )
나라현(奈良県) 출신. 고등학교시절부터 8mm, 16mm영화를 제작하였으며 1975년에 친구와 함께 영화 제작 그룹 「신에이 클럽(新映倶楽部)」을 결성하였다. 같은 해에 성인영화 『간다 간다 마이트 가이(行く行くマイトガイ 性春の悶々)』로 감독 데뷔 한다. 1981년 작 『가키 제국(ガキ帝国)』로 대 히트를 치고 일본영화감독협회 신인장려상을 수상한다. 1983년에는 아다치 미즈루(あだち充) 원작의 인기만화 『미유키(みゆき)』의 감독을 맡으나, 스트레스로 우울증 증세를 보이게 된다. 1991년 9월에는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録)』촬영 도중 엑스트라 배우가 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이후 한동안 휴업한다. 1993년 『돌연한 불꽃의 고토쿠(突然炎のごとく)』 으로 감독직에 복귀. 1996년에 발표한 『키시와다 소년의 우연대(岸和田少年愚連隊) BOYS BE AMBITIOUS』에서는 칸사이(関西)지방 출신답게 오사카의 풍경을 아름답게 필름에 담아 블루리본 상 작품상을 수상한다. 2005년 작 『박치기!(パッチギ!)』에서는 「임진강」이라는 곡을 테마로 재일 한국인에 초점을 맞추어 일본 대중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으로 다시 한번 블루리본상 작품상을 수상하고 그 외에도 다수의 영화상을 수상하였다. 2007년에 발표한 속편 『박치기!(パッチギ!)LOVE&PEACE』도 호평을 얻었다. 그 다음해에 발표한 『TO THE FUTURE』에서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몬스터 페어렌트(モンスターペアレント)」(학교측에게 자기 중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되풀이하는 보호자를 의미함)를 주제로 하는 등 현대 사회에 만연하는 문제를 다룬 작품을 다수 발표하고 있다. 영화 제작 시 철저한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으며 배우에게 엄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쾌한 독설가 캐릭터로 탤런트와 코멘테이터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웃음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애수」
사진출처; http://lavo.jp/shira-teki/lavo?p=log&lid=45362
8. 스오우 마사유키
(周防正行, 1956년10월29일 - )
도쿄도 출신. 각본가로서도 활약하고 있다. 릿쿄(立教)대학 문학부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 후 쿠로사와 감독 등의 조감독을 거쳐 1984년에 『변태가족 형수님(変態家族 兄貴の嫁さん)』으로 감독 데뷔한다. 1989년 오카노 레이코(岡野玲子)원작의 인기만화 『팬시 댄스(ファンシイダンス)』를 영화화하여 젊은 수행 승려들의 일상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주목을 모아 높은 평가를 받게 된다. 1991년에는 모노키 마사히로(本木雅弘) 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대학의 약골 스모부를 무대로 그린 『으라차차 스모부(シコふんじゃった。)』를 발표하였다. 1996년에는 『Shall We Dance?』(야쿠쇼 코지(役所広司)주연)로 일본 아카데미상 감독상과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일본 영화계의 히트 메이커로 이름을 날린다. 이 영화는 리차드 기어를 주연으로 하여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 되어 큰 화제가 되기도 한다. 이후 긴 공백기를 깨고 2007년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それでもボクはやってない)』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2007년도 키네마 순보(キネマ旬報) 베스트 원”을 차지하였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웃음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애수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미국인이 만든「Shall we dance?」
「독특한 유머 코드로 펼치는 (미타니 월드)」
사진출처; http://special.enjoytokyo.jp/TK/237.html
9. 미타니 코우키
(三谷幸喜, 1961년7월8일 - )
도쿄도 세타가야구(世田谷区)출신. 극작가, 각본가, 배우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1983년 일본대학 예술학부 연극학과 재학 중에 극단 「도쿄 선샤인 보이즈(東京サンシャインボーイズ)」를 결성하여 각본가 겸 연출가로 활동한다. 학생 때부터 TV방송작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영화감독으로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여 『모두의 집(みんなのいえ)
「가장 주목 받는 영화계의 젊은 피」
사진출처; http://journal.mycom.co.jp/articles/2008/03/26/yukisada/index.html
10. 유키사다 이사오(行定勲, 1968년 8월 3일- )
쿠마모토현 출신. 쿠마모토현립 제2고등학교 보통과를 졸업하고 동방학원전문학교(東放学園専門学校) 재학 중에 제작회사에 입사하였다. TV드라마와 인디즈 영화 조감독을 거쳐 이와이 슌지(岩井俊二)감독의 『Love Letter』(1995)와
『스왈로우테일(スワロウテイル』(1996)에 조감독으로 참가하였다. 『Love Letter』는 1999년 한국과 대만에서도 개봉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1997년에 장편영화 데뷔작
『OPEN HOUSE』를 발표한 후 일부 업계 관계자로부터 포스트 이와이(岩井)라 불리며 주목 받기 시작한다. 이 후 『OPEN HOUSE』를 본 프로듀서로부터 의뢰를 받아 『해바라기(ひまわり)』(2000)의 감독을 맡았다. 2001년 작인 『GO』는 재일 한국인 3세 소년의 이야기를 그려 대 히트를 기록하고 다수의 작품상을 수상하게 된다. 이 성공에 힘입어 이후에도 『세계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世界の中心で、愛をさけぶ)』(2004), 『북쪽의 영년(北の零年)』(2004), 『봄눈(春の雪)』(2005)등의 작품을 연달아 히트시켜 히트 메이커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젊은 영화감독 중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감독이기도 하다. 촬영 시 본인이 납득할 때까지 OK싸인을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처:인니뽄메거진)
'바잉 도시 > 일본 오사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울] 일본무역 설명회 예약확인 / 'choi'님^^ (0) | 2010.04.02 |
---|---|
[서울] 일본무역 설명회 입금확인 / 'smtrip'님 (0) | 2010.04.02 |
제187차 일본 오사카 창업 & 소호무역 실무연수 완료 (0) | 2010.04.01 |
IKEA의 숨겨진 보물 (0) | 2010.04.01 |
Re:제189차 항공연수로 변경 (0) | 2010.04.01 |